베트남 역사

베트남과 프랑스의 역사적 관계 - 1부.

친절한 대두씨 2023. 1. 28.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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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 짜오~ 안녕하세요^^

오늘은 베트남역사에서 베트남과 프랑스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트남과 프랑스 하면 단순히 식민지배만을 떠올리기 쉬운데, 그 식민지배가 하루아침에 뚝딱 이뤄진 것이 아니다 보니,

어떻게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어떻게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식민시대의 베트남과 독립까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생각보다 내용이 방대하여 오늘 한 번에 마무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2편에 걸쳐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초의 접촉

베트남을 방문한 최초의 프랑스인 하나는 예수회 신부 알렉상드르 로드이며그는 1620년에 베트남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베트남에 머무는 동안, 로마자 기반의 베트남어 표기법 정리하였고, 이는 20세기 프랑스 식민 시절에 현재의 베트남어 표기법으로 정리됩니다. 알렉상드르 로드 신부는 최초의 베트남어 교리 문답을 썼고, 베트남에서 계속 지내다가 1650년에 유럽으로 돌아갔습니다. 베트남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발전(당시에 10만 명이 개종) 이끌기 위해 주교가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는 주교를 파견하여 강력한 현지인 성직자를 만들고1620경에 일본 기독교에서 발생했던 사례처럼 베트남에서 재앙적인 기독교 탄압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일본 교회에 일어난 일이 안남 교회에도 일어날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통킹 코친차이나 있는 들은 전쟁에서 매우 강력하고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교황청은 성좌 기적적인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배가시키는 동양 지역에서 자체적인 사제 양육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교가 없다면, 사람들은 성사없이 죽을 것이며 명백히 지옥으로 떨어질 겁니다.”    -알렉상드르 로드-

알렉상드르 로드의 노력으로 파리 외방전교회가 창설되었으며, 프랑스 가톨릭이 아시아에서 새로운 선교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660년부터 시암 아유타야에서 프랑수와 팔루와 람베르 모트에 의해 기초가 닦여졌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베트남에 선교사를 파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후 레 왕조와 프랑스의 관계 (~1802년)

18세기 중기 프랑스 인도에서 영국에게 패한 플라시 전투 이후 베트남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당시 베트남은 남북 대립시기로 명목상의  왕조하에, 북쪽은 하노이  가문(黎氏), 남쪽에는 후에(Hue) 응우옌 가문(阮氏) 세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777년에 또다른 응우옌 씨가 후에(Hue) 빼앗고 하노이 마저 차지하여 떠이선 왕조(1778 ~ 1802) 세웠습니다. 이에 처음부터 후에(Hue) 있었던 완씨완씨, 응우옌푹아인(훗날응우옌 왕조 초대 황제 자롱) 프랑스 선교사 피뇨 비엔 통하여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프랑스는 영토 할양과 프랑스인의 거주, 왕래, 상행위의 자유 특혜를 조건으로 내세워 원조하기로 하였으나, 프랑스의 별다른 도움 없이 1802후에(Hue) 응우옌 왕조 다시 일어나 마침내 베트남 전역을 통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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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응우옌 왕조 침략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시아는 19세기 이후, 유럽 열강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청나라와 불평등 조약인 톈진 조약 체결(1858) 직후, 무장 침략을 통하여 베트남을 강점하고 자기의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185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프랑스군은 남부의 다낭 · 비엔호아성 · 자딘성(현재의 호찌민시) · 딘뜨엉성 등의 땅을 침략하여 점령한 , 침략을 연장하여 통킹 하노이·하이즈엉 · 남딘 등의 땅까지 세력을 뻗었습니다. 게다가, 내부의 혼란에 빠진 응우옌 왕조 하여금 국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하는 사이공 조약(1862) 체결을 강요하였습니다. 이때 프랑스가 얻은 토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일부를 이루게 되며, 프랑스는 1 후에(Hue) 조약·2 후에(Hue) 조약 맺고 베트남을 보호령에 편입시키는 성공합니다.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지배 하에서 무거운 세금과 부역소금·알코올·아편 전매 등의 착취를 당합니다. 저항 운동에 참여한 자의 다수는 비밀경찰에 의해 투옥되어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로부터 경제적인 수탈뿐 아니라 전통문화를 파괴당하고 프랑스 문화를 강요당하는 전형적인 식민지 정책의 압정을 겪다가 2 세계대전  프랑스 본국이 독일에 점령되고중일 전쟁 확대에 따라, 일본은 프랑스로부터 중화민국 물자를 차단시키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권과 친화 정책을 써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일본군 진주를 인정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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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왕조 성립부터 코친차이나 할양까지 (1802 ~ 1862)

응우옌 왕조 명명제

응우옌 왕조 초기 얼마간, 베트남과 프랑스는 교섭이 없었다가 프랑스는 프랑스혁명(1789년)과 나폴레옹 전쟁 종전(1815) 이후, 통상관계를 요구하고 베트남에 사자를 파견하는 베트남의 경영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자롱 황제 왕조수립의 공적을 인정하여 프랑스 사람을 우대하고 있었지만, 통상요구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여, 프랑스의 태도를 보고 경계하기 시작하여 쌍방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게다가 명명제 즉위(1820)하면서 점차 프랑스 사람에 대한 우대조치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1826년에는 개국을 요구하는 프랑스 군함의 함장과의 접견을 거부하고, 건국 때의 공적자인 프랑스인 쇼니의 조카가 영사 자격으로 순방을 해왔지만 이것마저 거부해, 베트남과 프랑스의 공식 관계는 한동안 중단되었습니다.

가톨릭 탄압

더구나 시기에 베트남에서 기독교 박해받음으로써 베트남-프랑스 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명명제가 즉위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어1836 유럽인 선교사 7명을 처형하고 수백의 교회 파괴되자, 교회탄압을 두려워한 만의 민중들이 산이나 들로 숨어들었다. 19세기 중반 베트남의 가톨릭교도가 45 명으로 늘어났으나, 응우옌 왕조는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을 하였습니다1840~1860년까지 유럽인 선교사 25명과 베트남 성직자 300명을 처형하여 2 명의 신도가 죽었고, 그들의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함대파병

1842 영국이 1 아편 전쟁에서 승전하고난징 조약 체결로 중국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남쪽에서 중국으로 접근함으로써 이러한 영국의 개입에 대응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이에, 1843 프랑스의 외무장관 프랑수아 기조 장바티스트 세실 제독과 레오나르 샤르네르(Léonard Charner) 대령의 지휘하에 베트남에 함대를 파병하였고이것은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중국 내에서의 영국의 활동을 돕고, 베트남 내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에 대한 보복이라는 핑계를 내세웠습니다.

뜨득 황제

1845 프랑수아 기조는 세실을 베트남으로 보내어 가톨릭교회 선교사인 도미니크 르페브르(Dominique Lefèbvre) 주교를 구출해 오도록 합니다. 1847년에 즉위한 뜨득 황제 선대에 이어 보수주의와 쇄국정책을 펼칩니다. 1847, 2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들(베트남에 은밀히 들어갔다가 2번째로 수감된 도미니크 르페브르 주교와 뒤클로스) 수감되자 이들을 구출하고, 베트남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하여 세실은 2대의 전함(글르와르, 빅토리외즈) 라피에르(Augustin de Lapierre) 대령을 다낭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르페브르 주교가 이미 자유의 몸이 되어 싱가포르 가는 길이었고, 만약 라피에르 대령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라피에르는 베트남의 배들의 마스트를 해체함으로써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협상이 아무 성과없이 결렬되자 결과적으로 1847 4 14, 프랑스는 다낭 항에 정박중이던 나머지 다섯척의 황동 갑판으로 되어 있는 배들을 침몰시키는 공격을 이어갔습니다. 1847 4 15, 프랑스 함대와 베트남 배들간의 전투(다낭 폭격) 벌어져, 베트남 배들중 세 척이 침몰하고 프랑스 함대는 빠져나왔습니다.

나폴레옹 3세

한편,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 쿠데타(1851)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프랑스가 동아시아에 세력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2 국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가 문명화된 서구 문화를 전파해야 임무를 띠고 있다는 사상이 퍼져 있었습니다. 결국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목적이었고, 나폴레옹 3 프랑스는 영국 연합하여 2 아편 전쟁(1856~1860) 치르는 한편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식민지를 구축하기 위한 단계들을 밟아 나갔습니다스페인 출신의 호세 마리아 디아스 신부가 베트남에서 순교하자 (1857 7 20, →Thomasian Martyrs) 그는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베트남의 박해에 응징하고 베트남 조정에 프랑스군의 베트남 주둔을 강요하고자 전쟁의 개시를 승인(1858)하였습니다. 이로써 1858년부터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였고프랑스 해군 리고 주누이 제독 지휘하에 다낭 사이공 점령(각각 1858 9 1 1859 2 17) 합니다. 사이공의 점령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화 시작이었고, 프랑스 해군 남부 베트남 요충지에서 베트남군을 패퇴시켰습니다. 프랑스는 1861에는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여, 결국 뜨득 황제 1862 항복합니다. 프랑스와 베트남 간에는 불평등 내용을 담은 사이공 조약 체결하고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사이공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남부 베트남 비엔호아성자딘성딘뜨엉성 3 할양한다.

(2) 베트남은 프랑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한다.

(3) 프랑스의 전함이 메콩 자유 항해하는 것을 허용한다.

(4) 프랑스의 베트남 내에서의 자유로운 가톨릭 포교 특권을 인정한다.

(5) 3개의 항구를 프랑스와의 무역을 위해 개항한다.

(6)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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