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과 프랑스의 역사적 관계 - 2부
홍 강 통상 문제와 북부 베트남 공략 (1867~1883년)
응우옌 왕조에서는 1865년에 레 왕조의 후손이라 자칭하는 사람의 반란 등, 여러 반란이 빈번히 일어났고, 1867년 태평천국 계통의 오곤(吳鯤)의 흑기군이 침입해와서 프랑스와 대립하였습니다. 1867년 프랑스는 남부 베트남과 사이공을 점령하고 코친차이나로 개명했고 코친차이나의 식민지화에 성공한 프랑스는 메콩강을 이용한 중국 윈난과의 통상로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상세한 조사를 한 결과, 메콩강 중류는 현재의 라오스, 캄보디아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급류 및 암초가 많아 그 상류로는 항해가 불가능하였으므로 통상로로 이용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대안으로서 통킹에서 홍 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 윈난에 도달하는 통상로를 주목했고, 1871년 프랑스의 모험가이자 상인인 장 뒤퓌(Jean Dupuis)가 홍 강을 통해 윈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1872년 11월 뒤퓌는 베트남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무장군대를 태우고 홍콩을 출발해 홍 강까지 물건을 실어 나르기로 작정했습니다. 위협도 하고 뇌물도 쓰면서 베트남인들의 저지를 뚫고 마침내 윈난으로 수하물을 운반했으나, 하노이로 돌아온 그는 자신을 도와준 베트남 동료들이 투옥되고 그의 배와 부하들은 앞으로 홍 강에서 장사를 못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됩니다.뒤퓌로부터 보호요청을 받은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총독 마리 쥘 뒤프레(Marie-Jules Dupré, 재위 1871~74년)는 사건조사를 명목으로 프란시스 가르니에 해군 대령을 하노이에 파견하였습니다. 뒤퓌의 요청을 받은 가르니에는 1873년 11월 5일 하노이에 도착해 베트남 관료들과 정면대결을 시작합니다. 11월 20일 무장이 잘 된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하노이 성채를 공격해 수적으로 우세한 베트남 군대를 이겼고, 그뒤에도 계속 공격을 시도해 송코이 강 삼각주의 여러 곳을 점령합니다. 또한, 하이즈엉, 닌빈 등지를 공격하였으나 1 2월 중순경 베트남 정부는 류융푸가 이끄는 중국 흑기군에 협력을 요청했고, 마침내 1873년 12월 21일 가르니에는 하노이 성채를 공격해 온 흑기군을 격퇴하려다가 전사합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프랑스의 외교적인 압력 아래 사이공에서 1874년 3월에 평화와 연맹조약(이를 "제2차 사이공 조약", "갑술조약"이라고도 한다.)을 체결하였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프랑스와 베트남은 영구연맹하며,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승인한다.
2. 베트남은 대외정책은 프랑스의 대외정책과 부합하여야 한다.
3. 베트남에서 천주교는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다.
4. 하노이를 개항하고, 영해에서 운남에 이르는 수로로 대외무역을 개방하여, 프랑스 영사는 치외법권을 향유한다.
5. 조약체결1년 만에 후에(Hue)에 공사를 파견한다.
결과적으로 이 조약은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대신 기존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년 7월 19일 – 1871년 5월 10일)에서 패한 이후, 점차 국력을 회복하여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을 기도하였고, 1881년에 프랑스 의회는 240만 프랑을 베트남에서 군비로 사용하도록 승인하였습니다.홍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던 프랑스인이 흑기군에 저지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총독 르 밀 드 비렐 제독은 갑술조약(또는 제2차 사이공 조약, 1874년) 위반을 문책하기 위해 프랑스 코친차이나 해군함대 사령관 앙리 리비에르(Henri Rivière) 해군 대령을 하노이에 파견합니다. 1882년 초에년초에 하노이에 도착한 리비에르는 교섭이 무익하다고 판단해 즉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1882년 4월에 하노이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년에는 흑기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고, 뜨득의 원군 요청을 받은 청나라는 통킹 지방에 출병하여, 흑기군도 떠이 선(西山)을 거점으로서 프랑스군과 대치합니다.
한편, 1882년에 청나라의 이홍장은 프랑스 공사 보우리(Bou-ree)와 톈진에서 담판을 시작하여 가조약 3조에 합의하였다. 즉 중국은 군대를 운남, 귀주 성으로 철수시키고, 프랑스도 베트남을 침략, 점거하지 않으며, 베트남 국왕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며, 보승(保勝)을 개항하여 중국과 프랑스가 여기에서 무역하며, 또한 이곳을 중국의 영토와 같은 비율로 세금을 징수하고, 중국과 프랑스는 경계를 설정하여 베트남 북부의 자치를 보호한다고 하였습니다. 톈진 담판의 가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군은 철군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베트남 북부의 변경을 순시하였는데, 이 사실을 몰랐던 흑기군은 이들과 충돌을 일으켜 프랑스군을 물리쳤습니다.
위기를 맞이한 응우옌 왕조에서는 급기야 1883년 7월 9일, 뜨득 황제가 사망하고, 이어 7월 20일 죽득 황제가 즉위하지만, 불과 3일 후인 7월 23일 폐위되고 7월 30일에 히엡호아 황제가 옹립됩니다.응우옌 왕조 내부의 극심한 혼란을 틈타 프랑스는 후에 공략을 결정하고, 1883년 8월에 후에의 외항인 후안을 공략하고 그대로 후에로 진격하자 응우옌 왕조는 저항하지 못하고 강화를 요청하여, 계미조약(제1차 후에 조약,아르망 조약)을 체결되게 됩니다. 이 조약으로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어, 안남(중부)은 완조에 의한 통치를 인정하였지만, 통킹(북부)에는 프랑스 영사관을 설치, 비엔투안 성을 프랑스에게 할양하며, 프랑스는 홍 강의 양안에 군사 보급 지를 설치하고 흑기군을 축출하기로 합니다. 이 소식이 청나라에 전해지자 주전파들은 베트남의 원조를 주장하였습니다. 단지 공친왕과 이홍장은 무력 사용을 반대하고 외교적인 방법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여 '이홍장-트리코 회담'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북위 20도선을 경계로 하자는 이홍장의 주장과 북의 22도를 경계로 하자는 프랑스의 주장이 대립하여 결렬되고 결국, 프랑스는 무력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고자 흑기군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히엡호아 황제는 즉위 후 완문상, 존실설 두 명을 숙청하려 했지만, 반대로 두 사람에 의해 독살(11월 29일)되어 끼엔푹 황제가 옹립(12월 2일)되었습니다. 1883년 12월에 흑기군은 반격하여 하노이를 탈환하고 프랑스의 리비에르는 전사(1883년)합니다. 패전 소식을 들은 프랑스 정부는 베트남 정벌군 파견을 결정하고, 응우옌 왕조와 프랑스 사이의 긴장도 높아졌습니다.
프랑스의 베트남 전역 지배 (1884년~1945년)
프랑스는 1884년 4월에 포르니에르(Fo.E.Fournier)를 청나라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담판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청은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국경으로 철수시키기로 하는 대신, 프랑스는 중국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5개 조로 된 '청-프 간명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1884년 6월에는 갑신조약(제2차 후에(Hue) 조약, 파트노트르 조약)이 체결되어 응우옌 왕조는 완전히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조약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임을 받아들이고, 프랑스는 통감을 베트남에 두기로 합니다. 간명조약 체결 이후 철군 명령을 전해받지 못한 베트남 주둔 청나라 군대와 홍하를 순시하려는 프랑스 군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를 '북려충돌'이라 부릅니다. 이때 청조에서는 주전파 장지동을 다시 양광총독으로 임명하고 진보침과 장패륜을 광동과 복건에 보내 군무를 처리하도록 하는 한편, 베트남에 있는 유영복을 데려오도록 합니다.
프랑스도 대대적인 중국 침략계획을 수립하고 해군에게 타이완 섬의 기륭을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복곤의 마미(馬尾)를 공격하여 청나라의 복건 함대를 패퇴시킵니다. 끼엔푹 황제는 즉위 후 불과 8개월 만에 사망(1884년 7월 31일)하고, 끼엔푹 황제의 남동생인 함응이 황제가 즉위(8월 2일)합니다. 프랑스의 공격에 대해 청은 지금까지의 타협정책을 버리고 8월 6일에 정식으로 프랑스에게 선전포고 합니다. 우선 육로로 군대를 신속하게 베트남으로 이동시키는 한편 연해의 해군에 대하여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철저하게 방어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육로의 작전은 주로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과 베트남의 영토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1884년 2월에 변경의 요지인 진남관이 함락되었다가 풍자재가 이끄는 군대의 공세로 겨우 수복합니다. 해로의 경우 전세가 중국에게 유리하지 못하였으나 프랑스에게도 결코 유리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영국, 미국, 독일 등이 조정에 나섰는데, 특히 영국은 총세무사인 하트를 이용하여, 하트는 영국정부로부터 위임을 받고 중국해관의 영국 런던사무처의 캠벨(James Dunean Campbell)을 1885년 4월에 프랑스 파리 시로 파견하여 '청-프 간명조약이 유효하다'는 전제 아래 프랑스와 정전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청불 전쟁은 끝났으며, 1885년 6월에 이홍장과 프랑스 공사인 쥘 파트노트르 사이에 톈진에서 중국이 베트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청-프 신약" (혹은 톈진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로써 청나라는 응우옌 왕조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또한, 중국과 베트남의 변경 두 곳의 통상 장소를 정하기로 하는 한편, 프랑스 화물은 베트남과 광서 변경에서 관세율을 감하기로 하고, 이후 중국에서 철도를 건설할 때 프랑스와 협상하도록 하였습니다.
1885년 7월(음력 5월 23일), 프랑스의 고압적 태도에 반발한 존실설은 쿠데타를 일으켜, 후에의 프랑스 주둔군 및 프랑스인들을 습격해 프랑스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프랑스군은 즉각 반격을 시작해 궁성을 점거했고, 존실설은 함응이 황제를 데리고 북방의 광평성으로 도피하여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 각지에 격문을 돌렸습니다. 프랑스는 함응이 황제의 후에 귀환과 존실설의 체포에 열을 올렸지만, 산속에서 게릴라전을 하는 두 사람을 체포하지 못하고, 1885년 9월에 함응이 황제의 퇴위를 선언하고 동경제를 옹립했습니다. 그 후도 프랑스에 대한 항쟁은 계속되었지만, 근대적인 프랑스군에 번번이 패하게 됩니다. 함응이 황제도 광평의 오지 산골에서 저항을 계속했지만, 1888년 11월에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알제리에 유배되고, 존실설은 청나라에 망명하였습니다. 반정봉이나 황화탐에 의한 저항이 계속되었지만, 그들도19세기말에는 거의 진압되어 프랑스의 본격적인 베트남 통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1859년부터 1885년까지 프랑스는 무력을 통해 타이와 미얀마를 제외한 인도차이나 반도(즉, 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지화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885년)를 세웠습니다. 이로써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포함되었고, 프랑스는 베트남 사회에 뚜렷한 정치적 및 문화적 변화를 가져오며, 근대 교육의 서구적인 체계가 도입되고 베트남 사회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습니다.
베트남의 독립운동
프랑스에 의한 베트남 통치가 시작된 이후 응우옌 왕조에게는 사법, 행정권 외에 전례, 은사, 훈장 수여 등의 명목적인 권한만이 주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의 무력투쟁에 의한 응우옌 왕조 재흥으로부터, 유럽의 선진적인 문물과 사상을 배워 근대화를 도모할 필요성이 주창되어 일본 유학에 의한 베트남 근대화를 도모하는 동유운동으로 발전합니다. 이러한 운동은 점차 급진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해 프랑스 당국의 압력을 받게 됩니다.
1889년 타인타이 황제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1907년 9월, 프랑스의 압력으로 퇴위하여 아들인 주이떤황제에게 양위를 합니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정체된 응우옌 왕조 내부에도 큰 영향을 주어,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하에 의해 프랑스군의 방위력이 약해지자 주이떤 황제는 독립세력과 동조하여 후에 왕궁을 탈출하지만6일 만에 체포되어, 주이떤 황제는 아버지 타이타인과 함께 아프리카의 프랑스령 레위니옹 섬에 유배를 가고 대신 카이딘 황제가 즉위합니다.
1925년에 카이딘 황제가 붕어하자 프랑스 유학 중이던 바오다이 황제가 귀국하여 즉위합니다. 그가 즉위할 때 황제의 사법, 행정권이 프랑스에 귀속되며, 바오다이 황제는 즉위 후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1932년에 귀국해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하여 입헌적인 정치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보수파의 저항에 의해 포기하게 됩니다.
일본군의 진주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종료
중일전쟁(1937년~1945년)이 격화되면서, 일본 제국 육군은 베트남으로부터 국민당 정부로의 물자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북부에 진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에서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무릎을 꿇었고,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비시 정권이 임명한 장 드꾸(Jean Decoux) 장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일본과 협력하여 일본군의 베트남 주둔을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하여 1940년에 일본군은 베트남 북부에 진출하고, 1941년에 베트남 남부에도 진주하였습니다. 바오다이 황제는 프랑스와 적대하는 일본군에 협력하여,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3월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공존하였습니다. 1945년 3월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 몰락하자, 1945년 3월 11일에 베트남에서 프랑스와의 공동통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반프랑스 쿠데타가 발발하였습니다. 즉, 일본군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실행하여 프랑스군을 제압하여 베트남을 독차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본의 영향력하에 있고 명목상에 불과한 베트남 제국이 수립되고, 바오다이는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패전과 그 직후의 '베트남8월 혁명'으로 불리는 혁명이 일어나, 8월 30일에는 후에의 궁전에서 바오다이는 퇴위하였고, 143년간 베트남을 통치했던 응우옌 왕조는 멸망하게 되고, 1945년 9월 호찌민은 하노이를 수도로 하여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