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 짜오~!! 안녕하세요~^^
오늘은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포스팅하겠습니다.
사실 베트남이 치른 1차~3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연속적인 사건으로 개별적으로 구분 짓기가 상당히 어렵네요.
하지만 포스팅하려니 그 양이 너무나 방대하여 어쩔 수 없이 따로 구분하여 포스팅하는 중입니다.
오늘 3차 인도차이나 전쟁 포스팅 이후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부타 3차 전쟁까지 대략적으로 요약하여 그 흐름만 따로 한번 더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미국과 치렀던 베트남전쟁 이후부터 발생한 일련의 전쟁들을 말하며, 캄보디아와 전쟁 그리고 중국과의 전쟁 및 국경 분쟁 등을 말합니다. 이 3차 전쟁은 약 20년간 지속되었는데, 전쟁의 결과는 베트남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배 경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발생 원인에는 다양한 원인들이 있습니다.
당시 베트남의 정치, 외교적 상황을 보면, 미국과의 전쟁 이후 집권한 정치 세력들은 친 소련 성향의 세력들이었습니다. 이는 1969년 우수리강 국경 분쟁 이후 계속된 중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에서 베트남이 소련의 편을 들게 됩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직후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북부지역에 살고 있던 화교들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몰수하게 되는데, 그 결과 수많은 중국계 사람들이 보트피플이 되어 떠돌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이 중국의 심기를 건들게 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한방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발생하게 됩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1975년 4월 19일, 캄보디아에서는 하나의 거대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폴 포트를 중심으로 한 공산세력인 크메르루주가 친미 세력의 정권을 뒤엎고 캄보디아를 장악합니다. 그리고 발생한 킬링필드 사건...
이때, 크메르루주는 베트남 유학세력 및 베트남계 인사들까지 모두 축출하게 됩니다.
같은 공산주의 노선인 크메르루주가 베트남계 인사들 까지 축출한 이유로는 미국을 물리친 베트남이 인도차이나 반도의 맹주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독자적인 공산노선을 만들어 베트남에 대항하고자 한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베트남은 중국이 아닌 친소련의 노선이었으며, 캄보디아는 친중국 노선으로 이 둘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의 시작은 캄보디아의 선빵으로 시작됩니다. 1975년 5월 캄보디아가 베트남에 선제공격을 시작합니다. 크고 작은 분쟁들이 계속되다, 1978년 베트남은 주력군 15만을 캄보디아로 출병시킵니다. 이때 베트남의 출병 목적은 캄보디아의 제거. 즉 크메르루주의 제거였습니다.
중국의 베트남 침공
베트남의 친소련의 행보에 상당히 불쾌한 중국은 베트남이 친중세력인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세력을 침공하면서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나섰습니다. 중국은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던 베트남군의 철군을 목적으로 국경지역 전 지역에서 일제 포격을 시작으로 일제히 국경을 침공하였습니다.
이에 베트남은 산간지방의 민병대와 정규군 예비병력만으로 중국의 정규군을 상대하게 됩니다.
중국과 베트남의 전력 비교
당시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많은 중화기와 미군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들로 그 전력이 아주 강했습니다. 그리고 산간지방의 민병대 역시 1차 인도차이나 전쟁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전쟁을 치러온 베테랑들로 개인의 전투력 역시 상당히 강했습니다. 숫자는 비록 약 2만여 병에 불과했지만 전력에서는 결코 중국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중국은 약 30만이라는 정규군이 출병하였지만 당시 덩샤오핑의 문화 대혁명을 통해 군사장비의 신식화가 뒤처져 있었고 국경지역의 대규모의 지뢰밭 때문에 인해전술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의 양상
베트남군은 강력한 화력으로 전쟁 초반부터 중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지, 베트남은 까오방, 라오까이, 랑선 등 북부 5개 지역을 중국에 내주며 조금씩 후퇴하게 됩니다. 베트남은 후퇴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중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하노이 외곽에 총 결집하며 한방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캄보디아로 출병한 정규군이 합류하면서 베트남군의 전력을 더욱더 강력해집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국은 즉각 철군을 결정하고, 베트남군의 추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점령지의 사회기반시설들을 파괴하는 비인도적 행위를 하며 철군을 합니다.
중국의 베트남 침공부터 철군까지 약 한 달 동안 전쟁이 있었고, 두 나라의 군사력을 봤을 때 상당히 짧은 시간 내에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중국이 철군하자 베트남은 다시 캄보디아에 주력병력을 주둔시키고 1989년 9월에서야 캄보디아에서 완전히 철군하게 됩니다.
전쟁의 승, 패
중국과 베트남은 서로 자신들이 승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군사적 피해 규모를 봤을 때 두 나라의 피해규모가 비슷하지만 더 적은 규모의 군사력으로 대등하게 피해를 입힌 베트남군이 조금 더 우위라고 판단되고, 중국이 일시 정으로 '베트남군의 캄보디아에서의 철수'라는 목표를 달성한 듯싶으나 말 그대로 일시적이었기에 궁극적인 목표달성에는 실패하였다고 보입니다.
또한 서방의 군사전문가들 역시 베트남의 승리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후 상황
중국과 베트남은 1980년대 내내 국경선 확정을 두고 산발적인 전투를 계속하였고, 1984년 4월 대규모 폭격과 88년 스프래들리 군도 해전으로 알려진 스프래트리 제도의 해전을 포함하여 치열한 국경 분쟁이 지속되었습니다. 무력 충돌은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하기로 한 1989년에서야 끝이 났고, 양국은 1990년 9월 청도에서 비밀 정상회담을 가지고 관계 정상화에 동의하고 1991년 11월 공식적으로 정상화했습니다.
베트남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부터 시작하여 3차 인도차이나 전쟁까지... 약 40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프랑스, 미국, 중국이라는 강대국 3개 국가를 모두 물리치는 어마어마한 전과를 올립니다.
그리고 도이머이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경제발전에도 성공하게 되며 인도차이나반도의 강국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됩니다.
베트남에서 지낸 지 어느새 반년이 넘어가는데, 그동안 알게 된 베트남 사람들의 성격, 성향을 보면 이들이 어떻게 과거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지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서로 쉽게 친해지고 쉽게 친구관계가 형성됩니다. 이들에게도 '우리'라는 의미가 크게 작용하는데, 한국의 '우리'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한국의 '우리'라는 말이 깊은 관계의 의미라면, 베트남에서의 '우리'는 한국처럼 깊지는 않지만 한국보다 다양하고 넓은 의미를 가지는 말인 것 같습니다.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베트남에서 싸움이 발생하면 1대 1이 아닌 무조건 패싸움이 됩니다. 누군가 '내 사람'을 공격했다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한번 싸움이 시작되면 평소에는 한없이 순하고 착해 보이는 사람들도 한순간에 살의를 나타내고 물불 가리지 않는 싸움꾼이 되더군요. 그러다 보니 전쟁에서도 자신을 침략한 외세에 대항하여 결집이 잘 되는 것 같고, 이로 인해 어마무시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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