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후 레 왕조(1428~1527, 1533~1788)는 레 러이(Le Loi)에 의해 건국된 베트남의 대월국의 두 번째 왕조입니다. 베트남 역사에서 레 왕조가 2개가 존재했기 때문에, 10세기에 레 호안이 세운 왕조를 전 레 왕조로 하고, 명나라로부터의 독립 이후 세워진 대월국. 레 러이의 왕조는 후 레 왕조라고 불러 구별합니다. 또, 막당중(Mac Dang Dung)의 찬탈에 의한 일시 기간을 경계로 하여 후 레 왕조의 전기와 후기로 나눕니다.
호뀌리(Ho Quy Ly)에 의해 쩐 왕조가 멸망하고, 1407년 명나라의 침공을 막지 못하여 마침내 대월(Dai Viet)은 중국의 하나의 지방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항한 수많은 항쟁으로 대월의 힘이 부각되었는데, 농민출신 레 러이(Le Loi)에 의한 람선항쟁(1418~1427)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람선항쟁은 베트남의 명나라에 대한 항쟁의 기본 방향이 되었고, 마침내 명나라를 물리치고 1428년 하노이에서 대월이라는 국호를 다시 사용하여 레 왕조라는 자주국가를 세웁니다.
2. 레 왕조 전기
레 러이는 기존의 황족을 푸대접하고, 황제독재체제를 시행하려고 했으나, 그의 사후, 정권의 중추는 레 러이와 함께 명나라와 전투를 벌인 개국공신에 의해서 차지되었습니다. 개국공신들은 황족과 정략혼인 관계를 맺어, 지방에 많은 영지를 가진 호족으로써 정권을 주도했습니다. 전기 레 왕조의 역사는 개국공신과 그의 자손사이의 권력 투쟁이 제위 계승 싸움과 결합되는 형태로 변화했고, 레 왕조는 군제, 지방제도, 재정제도를 잘 정비하고 명조에도 사신을 보내어 책봉(冊封)을 받음으로써 내정·외교가 함께 안정되어 15세기 말에는 그 권세의 절정기를 맞게 됩니다. 레 왕조 지배시대는 베트남의 예술이나 문학이 장려되어 개화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들 분야에서 중국의 영향이 강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동시에 각각의 작품은 자유로움과 민족적 독자성이 두드러진 특색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434년 레 러이가 죽자, 아들인 태종(太宗)이 즉위 합니다. 즉위할 때에 불과 11살이었고, 당초 여찰(黎察)이라고 하는 인물이 섭정에 임하고 있었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친정을 개시하였고, 태종 시대에 과거제도를 확립하여, 1442년에는 첫 진사 합격자를 등용하였습니다.
1443년에는 인종(仁宗)이 불과 2살에 즉위하였고,레 왕조와 참파와의 분쟁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참파와 전투 중에서 참파왕 마하브샤를 포로로 잡는 등, 군사적으로 강했던 시기를 맞이하였으나, 생모 양 씨(楊氏)가(楊氏) 태종의 총애를 잃어 즉위할 수 없었던 것을 원망한 여의민(黎宜民)이 1459년 궁에 침입하여 인종과 그 생모 여씨(黎氏)를 살해하여 스스로 황제에 즉위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여기에 레 왕조 조정에 혼란이 생겼지만, 1460년 완치(阮熾)와 정렬(丁列)등의 세력이 여의민을 폐위시키고, 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종(聖宗)을 옹립하였습니다..
성종의 시대는 명나라와 우호 관계가 강화되었으나 반면, 참파와 대립은 심해졌던 시기입니다. 1470년 참파 제15왕조 제2대 왕인2 반 라체트안이 화주에 침공하자, 성종은 25만 군사를 이끌고 참파의 수도인 비쟈야를 공략하여 라체트안을 포로로 잡고, 참파를 예속하였습니다.이후 소수 민족(참인)으로서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으며, 지금의 라오스 지역에 있던 란쌍 왕국을 공격하였고 그 외 율령제도의 정비 등에 의해서 번영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번영도 계속 되지 않고, 그 다음 세대인 헌종(憲宗)이 요절하고, 그 아들인 숙종(肅種), 위목제(威穆帝)가 연달아 즉위 했지만, 국운은 더 쇠약해져 갔습니다.. 특히 위목제의 포악성은 귀왕(鬼王)라고 기록될 정도였고, 1509년 사촌동생 여주(黎晭)를 중심으로 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여주는 양익제(襄翼帝)로서 즉위했습니다.그러나 양익제도 즉위 후는 향락에 빠져, 황족을 살해하는 등의 포악성을 들어내어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고, 1516년 살해되었고, 이후 소종(昭宗)이 즉위하게 됩니다.
이 시기가 되면서 조정 내의 권신이 사병으로 항쟁을 펼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소종이 해양(海陽) 출신의(海陽) 무인 막당중(Mac Dang Dung)에게 관군의 지휘를 맡겼으나, 막당중의 전횡이 심해져서, 그 전횡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소종은 궁을 탈출하여, 서경(西京)의 정수(鄭綏)에게 도망갑니다. 막당중은 소종을 추적하는 군사를 보내는 것과 동시에, 소종의 동생 공황제(恭皇帝)를 옹립하였습니다.이렇게 하여 공황제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운 막등용과 소종을 보호하는 정수의 사이에서 항쟁이 일어났지만, 항쟁은 막등용이 유리하게 진행되어 1525년에는 소종을 연금 하여 1527년 살해하는 것과 동시에 공황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레 왕조는 멸망합니다.
3. 레 왕조 후기
막당중에 의해 레 왕조는 멸망했지만,레 왕조의 옛 신하인 완감은 1532년 여녕(黎寧)을 옹립하여 반 막 왕조 타도를 전개하여, 다음 해에는 여녕을 황제(장종)에 즉위시켜 레 왕조를 회복하였습니다. 무력으로 대립한 막 왕조와 이외에도 명나라에 정유료(鄭惟憭)를 사신으로 보내어 여녕이 대월국의 국왕의 정통성 승인을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찬탈자인 막당중의 문죄를 요구하였습니다.
후기 레 왕조의 실권은 완감이 장악 하고 있었지만, 완감이 막 왕조에서 항복한 장수에게 암살되어 사위인 정검(鄭検)이 뒤를 이었다. 이후, 레 왕조의 실권을 장악하는 찐 씨와 막 씨와의 사이에 내전이 계속되었습니다. 1592년 정검의 아들인 정송(鄭松)이 정권을 장악하고, 하노이를 탈취한 정송은 막 왕조의 군주인 막무습(莫茂洽)을 살해하고, 레 왕조를 완전히 부흥시켰습니다.(완=응우옌, 정=찐)
그러나 후기 레 왕조는 레 씨의 황위가 말로만 회복됐지 그 실권은 찐 씨의 수중에 있어, 레 왕조 황제는 허수아비 군주였고, 막-레 전쟁을 통해서 레 왕조는 완전하게 찐 가문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1599년에는 정검의 아들 정송이 영종(英宗)을 살해하고, 다섯 번째 아들인 세종(世宗)을 옹립하여 스스로는 평안왕이 되었고, 세종이 죽은 후에는 경종(敬宗)을 옹립하였고, 1619년 경종을 살해 후, 신종(神宗)을 옹립하였습니다. 또 정송의 후계자인 정장(鄭梉)은 남명으로부터 부왕으로 책봉되고 또 그 아들인 정작은 서왕을 자칭하는 등, 북부 하노이를 거점으로 하여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찐 가문이 막 왕조와 사투를 펼치는 동안, 완감의 아들 완황(阮潢)은 정검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당시 변경이었던 순화(順化), 광남(廣南)의 지방장관으로서 부임하였습니다. 이후, 부춘(현 후에)을 거점으로 현재의 중부 베트남에서 기반을 굳혀 반독립 정권(광남 완씨. 응우옌)을 만들어냈지만, 1592년 찐 씨가 하노이를 공략한 후에는 군사를 이끌고 북상, 막씨 잔당 진압에 활약하는 등 찐 씨와 표면적인 대립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완황이 죽고, 아들 완복원(阮福源) 때(阮福源) 찐 씨와 완(응우옌) 씨와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습니다. 17세기 두 정권은 격돌하는 듯하였으나,결과를 보는 일 없이 휴전하게 됩니다.
1771년 남방을 지배하고 있던 응우옌 가문에 대항하여 완악, 완여, 완혜 이 3형제가 서산당의 난(西山黨之亂)을 일으킵니다.(완감의 후예인 완씨와 다른 완씨. 예)김해 김, 경주 김....). 남부지역에 세력을 굳건히 하고있던 광남 완씨 세력을 몰아내고 싶었던 찐 씨는 서산당의 난을 일으킨 완씨 세력을 황제에게 항복시키는 형식으로 하여 함께 광남 완씨 세력을 공격하여 멸망시킵니다. 이 후, 완씨 3형제는 각자 지역을 분할하여 차지하였고, 1786년 일어난 반란과 기아, 메뚜기 떼의 피해 등이 발생하자, 이 틈을 타 하노이로 진격하여 찐 씨 세력을 멸망시킵니다. 현종은 완 씨 3형제 중 완혜를 불러들여 찐 씨가 누리던 권세를 그대로 넘겨주는 모습이 보이고, 현종 이후 민제 역시 완혜의 지지를 받아 즉위합니다. 민제는 서산조가 황실을 위협할 존재라 판단하고 정주의 잔당들을 모아 복벽을 시도했으나, 이는 실패하고, 민제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청군이 파병됩니다.
하지만 청군의 수장 손사의(孫士毅)는 음주와 향락만을 즐기고 정세에 신경 쓰지 않았기에 분노한 완혜와 서산군은 손사의의 거처로 쳐들어가 무방비 상태의 청군을 격파해 버리고 대패한 손사의는 청나라로 도망갑니다. 민제는 1788년 청군의 개입을 허락해 청군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대월을 공격했으나 완혜의 서산당에게 패배했고 민제가 도망감으로써 360년 명맥을 이어가던 후 레 왕조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사항은 완 씨 세력이 2중으로 나옵니다. 먼저 완감의 후예들. 막당중을 물리친 완감이 후기 레 왕조의 실권을 잡았어야 했으나, 일찍 살해당하며 그 권세가 사위인 찐 씨에게로 갑니다. 이후, 완감의 차남인 완황은 몸을 굽혀 차근차근 세력을 넓혀갔으니, 이 완씨 세력이 광남 완씨 세력입니다.
이후 나오는 서산당의 난에 나오는 완씨 3형제는 이 광남 완씨와는 전혀 다른 완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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