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왕조 (베트남어: Nhà Nguyễn, 1558년 ~ 1777년, 1802년 ~ 1945년)
1802년, 응우옌 가문의 자손인 응우옌 안(Nguyen Anh)이 떠이썬 왕조를 무너뜨리고 응우옌왕조를 세웠고, 이 왕조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며, 1945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 응우옌가문 배경
응우옌가문은 후기 레 왕조 중기 때 내분으로 갈라진 하나의 세력이었고 베트남 중부지역에 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후기 레 왕조 때 막당중이 왕권을 찬탈하고 막왕조를 열자 응우옌가문과 찐가문이 왕조를 수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찐가문의 세력에 밀려난 응우옌가문은 남쪽으로 밀려나게 되고 남부에서 200여년동안 그 세력을 유지합니다. 형식상으로는 레 왕조를 따르는 하나의 세력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독립적인 세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떠이썬 왕조가 들어서면서 응우옌가문은 몰살당하고, 그 때 살아남은 응우옌 안이 떠이썬 왕조를 무너뜨리고 후에를 수도로 하여 응우옌 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2. 응우옌왕조 건국
1777년 이후, 타이(시암. 지금의 태국)에 망명하고 있던 광남 완씨의 생존자 응우옌아인(이후 자롱제)은 시암 왕과 프랑스 선교사 등의 지원을 받아 끈질기게 떠이선 왕조에 항쟁하였으며, 결국 떠이선 왕조의 내분을 틈타 10년간의 싸움에 종말을 고하고 떠이선 왕조를 타도하게 됩니다. 그는 1802년에 수도를 후에로 정하고 응우옌가문을 재건하였으며(1802년부터 응우옌 왕조라고 칭한다.) 재건된 응우옌은 연호를 자롱(가륭)이라 고쳤습니다. 1804년에는 중국의 청나라로부터 월남 국왕으로 봉해지고, "베트남국"을 정식 국호로 삼았습니다. 응우옌 왕조는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지만, 주변의 여러 민족이나 제국에 대해서는 황제라고 칭했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승천흥운(承天興運)을 국시로 삼아 베트남에 작은 중화제국을 구축했습니다. 국호는 물론이고 국시와 연호도 국내의 공문서에 모두 기재하도록 하였습니다.
3. 초기
응우옌 왕조는 현재의 베트남과 비슷한 영역을 지배한 최초의 통일 정권이었고, 1815년, 가륭율례(嘉隆律例)가 발표되면서 중국적인 제도가 도입됩니다. 초기에는 성급한 집권화를 행하지 않고, 현재의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에는 북성총진을, 자딘(가정 : 현재 호치민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부에 자딘성 총진을 두어 대폭적인 자치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제2대 황제 명명제의 시대인 1830년대에 들어오면서 청의 제도를 모방한 중앙집권화가 추진되어 과거제도나 성을 구분한 지방제도가 정비되었습니다. 이러한 중앙집권화 정책은 북부, 남부 모두에서 반발을 불렀고, 북부에서는 레 왕조의 자손을 칭하는 '레 유양의 난', 남부에서는 자딘(가정)성 총진 레 문열의 아들 '레 문조개(려문조개)의 난' 등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또 대외적으로는 건국 시에 후원자가 된 시암(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캄보디아나 라오스를 둘러싸고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내부의 반란은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주변을 둘러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정세는 기본적으로 태국 측에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비록 국력은 최대에 이르렀지만, 주변국과의 분쟁으로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프랑스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응우옌 왕조는 건국 시에 프랑스인을 비롯한 유럽인의 도움을 받아 처음에는 기독교에 호의적이었고, 몇몇 고위급 인사들이 기독교도이기도 했다.(예를 들어 가정성 총진의 려문열 등) 그러나 중국적인 지배체제가 정비되고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부상함에 따라 배타적인 성향이 나타나 기독교는 박해를 받았다. 명명제가 기독교를 금지하여 외국을 배척하는 분위기로 정국을 진행시킨 것이나, '려문조개의 난'으로 많은 기독교도가 반란군 측에 참가한 사건 등도 기독교가 박해받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3.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
응우옌왕조 초기, 자롱제는 건국 당시 프랑스의 도움을 인정하여 프랑스인들을 우대하였으나, 프랑스와의 통상관계는 거절하여 왔습니다.그러다 명명제 때 프랑스인을 우대하지 않기 시작하며, 기독교를 배척하기 시자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을 처형하는 등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에 진출하는 계기가 됩니다.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목적이었고,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영국과 연합하여 제2차 아편 전쟁(1858년~1860년)을 치르는 한편,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식민지를 구축하기 위한 단계들을 밟아 나갔습니다. 1857년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디아스(San Jose María Díaz Sanjurjo) 신부가 살해되자,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베트남의 박해에 응징하고 베트남 조정에 프랑스군의 베트남 주둔을 강요하고자 전쟁의 개시를 승인(1858년)하였습니다. 이로써 1858년부터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였고, 프랑스 해군은 리고 드 주누이(Rigault de Genouilly) 제독 지휘하에 다낭과 사이공을 점령(각각 1858년 9월 1일과 1859년 2월 17일)하였습니다. 사이공의 점령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은 남부 베트남의 요충지에서 베트남군을 패퇴시켰고, 프랑스는 1861년에는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였습니다. 결국 뜨득 황제는 1862년 항복합니다. 프랑스와 베트남 간에는 불평등 내용을 담은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은 종결됩니다. 사이공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남부 베트남의 비엔호아, 쟈딘, 딘뜨엉(Định Tường) 3개 주를 할양한다.
2. 베트남은 프랑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한다.
3. 프랑스의 전함이 메콩 강을 자유항해하는 것을 허용한다. 프랑스의 베트남 내에서의 자유로운 가톨릭 포교 특권을 인정한다.
4. 3개의 항구를 프랑스와의 무역을 위해 개항한다.
5.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
4. 프랑스의 베트남 북부 공격 및 지배
1867년 프랑스는 남부 베트남과 사이공을 점령하고 코친차이나로 개명했고 코친차이나의 식민지화에 성공한 프랑스는 메콩강을 이용한 중국 윈난과의 통상로 개발을 추진합니다. 상세한 조사를 한 결과, 메콩강 중류는 현재의 라오스, 캄보디아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급류 및 암초가 많아 그 상류로는 항해가 불가능하였으므로 통상로로 이용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대안으로써 통킹에서 홍 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 윈난에 도달하는 통상로를 주목합니다. 1871년 프랑스의 모험가이자 상인인 장 뒤퓌(Jean Dupuis)가 홍 강을 통해 윈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1872년 11월 뒤퓌는 베트남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무장군대를 태우고 홍콩을 출발해 홍 강까지 물건을 실어 나르기로 작정하고, 위협도 하고 뇌물도 쓰면서 베트남인들의 저지를 뚫고 마침내 윈난으로 수하물을 운반했으나, 하노이로 돌아온 그는 자신을 도와준 베트남 동료들이 투옥되고 그의 배와 부하들은 앞으로 홍 강에서 장사를 못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됩니다.뒤퓌로부터 보호요청을 받은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총독 마리 쥘 뒤프레(Marie-Jules Dupré, 재위 1871 ~ 74년)는 사건조사를 명목으로 프란시스 가르니에 해군 대령을 하노이에 파견하였습니다. 뒤퓌의 요청을 받은 가르니에는 1873년 11월 5일 하노이에 도착해 베트남 관료들과 정면대결을 시작했습니다. 11월 20일 무장이 잘 된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하노이 성채를 공격해 수적으로 우세한 베트남 군대를 이겼고, 그 뒤에도 계속 공격을 시도해 송코이 강 삼각주의 여러 곳을 점령했습니다. 또한, 하이즈엉, 닌빈 등지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12월 중순경 베트남 정부는 류융푸가 이끄는 중국 흑기군(黑旗軍)에 협력을 요청했고, 마침내 1873년 12월 21일 가르니에는 하노이 성채를 공격해 온 흑기군을 격퇴하려다가 전사합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프랑스의 외교적인 압력 아래 사이공에서 1874년 3월에 평화와 연맹 조약(이를 "제2차 사이공 조약", "갑술조약"이라고도 한다.)을 체결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프랑스와 베트남은 영구연맹하며,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승인한다.
· 베트남의 대외정책은 프랑스의 대외정책과 부합하여야 한다.
· 베트남에서 천주교는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다.
· 하노이를 개항하고, 영해에서 운남에 이르는 수로로 대외무역을 개방하여, 프랑스 영사는 치외법권을 향유한다.
· 조약체결 11년 만에 후에에 공사를 파견한다.
결과적으로 이 조약은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대신 기존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당시 청나라와 베트남 사이에 잦은 충돌이 있었고, 미국, 영국, 독일이 조정에 나서 정전협정을 하고 텐진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완전히 인정하게 됩니다.
이에 베트남은 계속적으로 프랑스에 대항하였으나 이는 프랑스가 수도 후에를 침공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게 됩니다. 1859년부터 1885년까지 프랑스는 무력을 통해 타이와 미얀마를 제외한 인도차이나 반도(즉, 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지화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885년)를 세웠고, 이로써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포함되었습니다. 프랑스는 베트남 사회에 뚜렷한 정치적 및 문화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근대 교육의 서구적인 체계가 도입되고 베트남 사회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습니다.
5. 베트남의 독립운동
프랑스에 의한 베트남 통치가 시작된 이후 응우옌 왕조에게는 사법, 행정권 외에 전례, 은사, 훈장 수여 등의 명목적인 권한만이 주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의 무력투쟁에 의한 응우옌 왕조 재흥으로부터, 유럽의 선진적인 문물과 사상을 배워 근대화를 도모할 필요성이 주창되어 일본 유학에 의한 베트남 근대화를 도모하는 동유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점차 급진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해 프랑스 당국의 압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함응이 황제는 광평의 오지 산골에서 저항을 계속했지만, 1888년 11월에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알제리에 유배됩니다. 반정봉이나 황화탐에 의한 저항이 계속되었지만,그들도 1919세기말에는 거의 진압되어 프랑스의 본격적인 베트남 통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889년 타인타이 황제가 10세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1907년 9월, 프랑스의 압력으로 퇴위하여 아들인 주이떤 황제에게 양위를 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1914년)은 정체된 응우옌 왕조 내부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하에 의해 프랑스군의 방위력이 약해지자 1916년 5월 2일 주이떤 황제는 판보이쩌우(베트남어: Phan Bội Châu)가 조직 한 베트남 광복회의 반란 계획에 호응하여 후에 왕궁을 탈출했지만, 6일 만에 체포되면서 주이떤 황제를 옹위하여 반프랑스 혁명에 대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계획이 탄로 나게 됩니다. 주이떤 황제는 아버지 타이타인과 함께 아프리카의 프랑스령 레위니옹 섬에 유배를 가고, 주이떤 황제 대신에 카이딘 황제가 즉위합니다.
1925년에 카이딘 황제가 붕어하자 프랑스 유학 중이던 바오다이 황제가 귀국하여 즉위합니다. 그가 즉위할 때 황제의 사법, 행정권이 프랑스에 귀속됩니다. 바오다이 황제는 즉위 후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1932년에 귀국해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하여 입헌적인 정치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보수파의 저항에 의해 포기하게 됩니다.
6. 응우옌왕조의 멸망
중일전쟁(1937년~1945년)이 격화되면서, 일본 제국 육군은 베트남으로부터 중국 국민당의 중화민국으로의 물자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북부에 진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에서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무릎을 꿇었고,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 비시 정권이 임명한 장 드꾸(Jean Decoux) 장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일본과 협력하여 일본군의 베트남 주둔을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하여 1940년에 일본군은 베트남 북부에 진출하고, 1941년에는 베트남 남부에도 진주하였습니다. 바오다이 황제는 프랑스와 적대하는 일본군에 협력했습니다.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3월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공존하였습니다. 1945년 3월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 몰락하자, 1945년 3월 11일에 베트남에서 프랑스와의 공동통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반프랑스 쿠데타가 발발합니다. 즉, 일본군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실행하여 프랑스군을 제압하여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본의 영향력하에 있고 명목상에 불과한 베트남 제국이 수립되고, 바오다이는 황제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일본 군인 중에는 일본에 망명 중인 기외후(畿外侯)를 베트남 제국 황제를 세우려고 했지만, 남방군(南方軍)이나 제38군은 베트남의 새로운 정권에게 불간섭의 방침으로 군정의 실시나, 친일 정권 건설을 배제하는 걸로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오다이는 독립한 베트남의 최초의 원수의 지위를 손에 넣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패전과 그 직후의 '베트남 8월혁명'으로 불리는 혁명이 일어나, 8월 30일에는 후에의 궁전에서 보대제는 퇴위하였고, 143년간 베트남을 통치했던 이르는 응우옌 왕조는 명목상으로도 멸망하게 되고, 9월 호치민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응우옌왕조는 처음으로 문화번성을 위한 통합정부를 과시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은 나라를 현대화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응우옌왕조는 프랑스에 항복하여 식민지가 되었고, 베트남 국민들은 그들에 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습니다. 1883년 이후로 베트남 국민들은 그들 고유의 문화를 보호하고 자국 독립을 위해 서구문화의 선별적 수용, 식민주의자 및 부르주아를 쫓아내기 위한 과격단체들과의 대규모 봉기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였습니다.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세워졌고, 공산당은 그들의 혁명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1515년 만에 베트남 국민들과 함께 88월 혁명을 이끌고, 식민정부를 무너뜨렸으며, 새로운 베트남 공산국가를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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